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발레리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뒤늦게 도착한 뒤 아이밀리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드르 재위 시절 집정관을 지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서 고르디아누스의 반란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또한 갈루스에 의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이 되면서 로마 군단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에 이은 두번째로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중단된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이어받아 카르타고 주교와 로마 주교를 처형하였다.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될 무렵 로마 제국은 북쪽의 고트족이 대거 침입하여 발칸 반도를 유린하였고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도 다시 로마의 동방 속주를 노리기 시작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제국의 서부지역 통치를 위임하고 그 자신은 동부지역 통치에 전념한 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비록 초반에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갔지만 AD 260년 초 갑자기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샤푸르 1세의 회담 제의에 소수의 호위병력만 이끌고 갔다가 포로로 붙잡혀 버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힌 로마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